<유성어(流星語)>, 영화 줄거리와 가수와 배우로서의 장국영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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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어(流星語)>, 영화 줄거리와 가수와 배우로서의 장국영의 생애

by 제이제이지나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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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어 영화 포스터

1. 유성어(流星語)의 줄거리

조락은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융대란으로 인해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됩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평소 머물던 요트에서 잠을 청하려는데 배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 조락의 배에 아기를 버린 것입니다. 다시 아이를 다른 배에 버리지만 갑자기 내린 비로 서둘러 다시 아이를 데려옵니다. 그 후 아이와 같이 산지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흐릅니다. 그 시간 동안 조락은 다정한 아빠가 되어있었습니다. 예전처럼 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아명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조락의 집 근처에 사는 아란은 양로원을 운영합니다. 그런데 양로원을 후원하기 위해 소군이라는 여성 기업가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보면 압박감을 느끼고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소군은 아명에게는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를 계기로 아명과 조락과 가까워집니다. 조락, 소군 그리고 아명은 바닷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소군은 조락에게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아명을 키워야 하지 않겠냐는 조언을 합니다. 하지만 조락은 자신 있으면 아명을 데려가 하루라도 같이 지내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소군은 아명을 하루 데려가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아명은 벌써 아빠가 보고 싶다고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아이가 없는 사이 조락은 아명이 가지고 싶어 했던 모형배를 사러 갔지만 너무 비싸 손수 배를 만들어 놓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명은 소군이 사준 값비싼 모형배를 보고 자신의 배가 초라해 차마 꺼내지 못합니다. 어느 날, 아명은 바쁜 아빠와 함께하지 못하고 혼자 놀다 하마터면 트럭에 깔려 크게 다칠뻔한 일이 생깁니다. 이 사건으로 아명이 위험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한 공무원들은 아명의 환경을 조사하러 옵니다. 이때, 아이 출생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버려진 아이를 키웠던 조락에게 그런 서류는 없었습니다. 조락은 생모가 남긴 편지를 공무원에게 보여줍니다. 공무원들은 아명에게 불법입양을 했다며 경찰서에 조락을 데려갑니다. 소군은 우연히 조락이 가지고 있던 생모의 편지를 보게 되고 그 편지는 바로 자신이 썼던 편지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습니다. 몇 년 전 남편에게 버림받은 소군은 아이를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았고 아명을 조락의 요트에 두고 갔던 것입니다. 아명은 소군이 그때 버렸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심리적 고통을 가지게 되었고 양로원을 후원하는 등 복지사업을 하게 되며 아명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조락과 소군은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조락은 자신의 형편으로는 아명을 부유하게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하고 살아야 더 행복하다며 조락은 아이를 엄마에게 보냅니다. 아명이 엄마한테 가는 날 아들과 조락은 마지막 식사를 합니다. 엄마말씀 잘 들으라고 말하는 조락에게는 슬픔이 느껴지지만 천진난만한 아명은 밝은 모습입니다. 조락은 엄마한테 보내기 전에 아명과 뽀뽀를 하고 헤어집니다. 이때  아명을 재울 때 불러주던 작은 별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친아빠는 아니지만 조락에게는 아명이 자신의 인생에 우연히 들어온 큰 행복이었습니다. 이제는 별똥별이 스쳐 지나가듯이 아명을 놓아주어야 하지만 조락에게는 아명과 함께했던 행복했던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2. 가수로서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딛는 장국영

장국영(1956년 9월 12일 ~ 2003년 4월 1일)은 높은 평가를 받은 홍콩 가수, 배우, 영화 제작자입니다. 그는 홍콩 연예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장국영은 영국의 홍콩 구룡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예술에 초기 관심을 보였고 영국의 리즈 대학을 다녔고 그곳에서 섬유 경영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공연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를 중퇴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장국영은 1977년 가수로서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그의 정식 데뷔는 1977년에 개최된 아시아 가요제였습니다. 그의 데뷔 앨범인 "윈드스톰"은 1977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는 1984년부터 가수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후 장국영은 여러 곡의 영화 주제가를 작곡하여 대만 금마장과 홍콩 금상장에서 수상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의 독특한 목소리와 독특한 스타일로 범아시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수년에 걸쳐, 그는 수많은 성공적인 앨범을 발표했고 캔토팝, 만도팝, 그리고 심지어 전자 음악과 같은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며 다재다능함으로 알려졌습니다. 장국영은 베스트셀러가 된 수많은 앨범을 발매했고 홍콩 음악계에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중국 대륙에서는 장국영을 배우가 아닌 가수로 생각할 정도로 음악으로서도 크게 성공을 거둔 배우입니다.

3. 장국영의 홍콩 영화 산업에 대한 기여

그 후, 장국영은 1979년 영화 "노마드"로 영화 데뷔를 했습니다. 그의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들 중 일부는 존 우 감독의 "영웅본" (1986)과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1987), 천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 (1993)과 같은 영화들을 포함합니다. 또한 "아비정전"(1991)으로 홍콩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후로도 그는 80년대와 90년대 전성기를 누리던 홍콩영화에 다수 출현하였고 이때의 연기로 장학우, 여명, 곽부성, 유덕화와 같이 장국영은 홍콩 사대천왕으로 불리게 됩니다. 장국영의 인기는 홍콩을 넘어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넓은 팬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국영을 통해 홍콩 영화를 국제적으로 홍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장국영은 종종 복잡한 감정을 다루는 등장인물들을 연기하면서, 그의 남성적인 매력과 다재다능한 연기력으로 유명합니다. 영화 산업에 대한 그의 기여는 그의 경력 동안 다양한 상과 포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장국영의  삶은 항상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008년, 그가 우울증과 싸웠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것은 결국 그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홍콩 센트럴에 있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사망은 많은 팬들과 동료들을 충격에 빠트렸고, 그는 문화적인 아이콘으로 기억됩니다. 장국영은 홍콩과 그 너머에서 음악과 영화에 대한 그의 영향력 있는 공헌을 통해 계속됩니다. 연예 산업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느껴지고 있으며, 그는 칸토팝과 홍콩 영화 역사에서 가장 사랑 받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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