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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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

by 제이제이지나 2023.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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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극적 이야기

2016년 개봉한 매혹적인 한국 영화 "마지막 공주"는 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의 격동의 삶을 가슴 아프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중대한 정치적 격변의 시기와 제국 일본의 잠식하는 영향력의 시기인 20세기 초 한국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고종 황제의 막내딸인 덕혜옹주는 아버지에 의해 보살핌을 받고 정치적 긴장의 폭풍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왕궁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일본이 그 나라의 식민지화를 시작하면서 변화의 바람이 작은 나라를 휩쓸게 됩니다. 황실은 한국의 왕실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고종의 아들 영친왕은 일본에 볼모로 보내지게 됩니다. 아들을 강제로 떠나보낸 고종은 어린 외동딸만은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 시종 김황진의 아들 김장한과 약혼을 시킵니다. 그러나 고종이 독살되고 약혼은 없던 일이 되어버립니다. 이후, 어린 옹주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가족, 문화, 그리고 몹시 사랑하는 고향땅과 이별하여 일본으로 강제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성인이 된 덕혜와 장한은 영친왕의 자택에서 만나게 되지만 장한이 친일파인 한택수에게 아부를 떠는 그의 모습을 본 덕혜가 그에게 매우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장한은 이우와 함께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덕혜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려는 비밀공작을 세우지만 한택수의 방해로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납니다. 덕혜는 결국 일본에서 소 다케유키와 결혼을 합니다. 그는 조선 음식을 차려주는 등 덕혜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지만 덕혜는 끝까지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조선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들은 덕혜는 눈물을 흘리며 드디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합니다. 하지만 시모노셰키항에서 또 한 번 입국 거부를 당하고 그 사건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영화는 고국으로 돌아가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는 공주의 변함없는 결의를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화 속 내내 덕혜옹주는 고국을 떠나기 전 궁궐에서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러한 기억들은 그녀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녀가 현재 처해진 곤경에 대한 가슴 아픈 대조로 작용합니다. 영화 "덕혜옹주"는 덕혜옹주에 대한 감동적인 헌사로서, 식민지화의 시련과 개인적인 고난 속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서의 일생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2. 덕혜옹주의 일생

1912년에 고종황제의 막내 딸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조선 왕궁의 화려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인 고종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랍니다. 한 일화로 고종은 덕혜옹주를 매우 사랑하여 궁 안에 옹주만을 위한 유치원을 만들고 유치원에 갈 때는 가마를 타고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은 곧 정치적 격변의 가혹한 현실과 충돌하여 비극적인 일생으로 바뀌고 맙니다. 1925년, 겨우 13세때, 덕혜옹주는 그녀의 고국을 떠나 강제로 일본 유학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일본에 의해 사실상 억류되어 돌아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국 땅에 고립된 덕혜옹주는 사랑하는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일본의 관습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을 위해 노동자들 앞에서 친일 연설을 강요당하는 등 치욕스러운 일들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사는 내내 신경쇠약을 앓고 있었으며 어머니 귀인 양씨가 병으로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크게 상심하여 몽유병과 조현병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식민지 지배에 의해 가해진 거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궁에서의 기억을 붙잡으며 조국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덕혜옹주는 항상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정신 건강 문제를 포함한 개인적인 어려움과 비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들 속에서도, 그녀의 변함없는 애국심과 회복력은 그녀의 영원한 정신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식민지화의 혼란, 조국으로부터의 이별, 개인적 역경으로 특징지어지는 덕혜옹주의 이야기는 정치적 격변의 인간적인 희생을 가슴 아프게 상기시켜 줍니다. 덕혜옹주는 결국 정신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후 일본인 남편 소 다케유키와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김장한의 형인 김을한의 노력으로 1962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76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덕혜옹주의 가슴 아픈 인생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현대사의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3. 영화 '덕혜옹주'가 역사왜곡으로 비판받는 점

덕혜옹주의 삶을 그린 영화 '덕혜옹주'는 역사적 정확성, 이야기 전개, 민감한 역사적 사건 묘사 등 여러 측면에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주요 비평들 중 하나는 영화가 역사적 사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는 덕혜옹주의 삶을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일부 역사가들과 관객들은 이야기의 부정확성과 과장된 극적효과를 비판합니다. 어떤 사건들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허구적이거나 과장되었으며, 이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진실과 충실성에 반하는 내용입니다. 영화 속에서 덕혜옹주의 아버지인 고종은 그녀를 덕혜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덕혜라는 봉호는 고종의 사후 2년 뒤인 순종황제가 내려준 봉호입니다. 그리고 덕혜옹주가 강제로 일본에 보내지는 날 이미 궁에는 내시들은 모두 궁 밖으로 보내진 상태로 궁에는 궁녀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덕혜옹주가 떠날 때 궁에서 우는 내시들의 모습은 역사적 고증이 잘못된 부분입니다. 영화 속에서 덕혜옹주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과 무관하 내용이 포함되어 역사 왜곡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복잡한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얼버무려 일본의 식민지 기간 동안 한국 역사의 격동기에 대한 미묘한 묘사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역사 영화는 종종 예술적 표현과 중요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정확하게 대변하는 책임 사이의 균형을 맞추지 못한 점에서 비판을 받습니다. 영화 '덕혜옹주'는 한국의 마지막 공주의 불행한 인생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서사를 묘사하는데 진정성과 정확성, 책임감 있는 스토리텔링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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