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왕이 된 남자: 백성을 사랑한 가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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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 백성을 사랑한 가짜왕

by 제이제이지나 2023.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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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두가 바라던 왕이 되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2012년에 개봉한 역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왕을 위해 이중의 몸 역할을 하기 위해 데려온 평민의 이야기입니다. 광해군 8년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압력에 자신의 목숨에 위협을 느낀 왕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대역을 찾으라고 신하 허균에게 명합니다. 허균은 저잣거리에서 만담꾼 하선을 만나게 되고 광해와 닮은 모습에 왕의 대역으로 하선을 궁으로 데려옵니다. 돈을 받고 하룻밤만 왕의 대역을 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왕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바람에 하선은 계속해서 광해의 대역을 맡게 됩니다. 그동안 하선은 광해의 걸음걸이, 말투를 흉내 내고 백성을 사랑하는 자신의 의견까지 펼치며 국정까지 다스리게 됩니다. 비록 왕 노릇을 하는 하선이었지만 왕이 남긴 음식으로 궁녀들이 끼니를 해결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음식을 많이 남기려고 노력하는 배려심을 가지고 있었고 중전이 웃는 것을 보기 위해 이에 김을 붙이는 유머러스함, 시종 사월이에게는 어머니를 꼭 만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가슴 따뜻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민하고 냉소적이었던 원래의 왕 광해와는 달리 인간미를 가진 따뜻한 왕의 모습에 중전, 도부장, 조 내관 등 주변인들은 헷갈려하면서도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그가 진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안 대신들은 가슴의 상처를 확인하려 하며 하선을 위협하지만 진짜 왕 광해의 등장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왕의 대역을 하는 평민 남자가 모두가 바라는 진짜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로 역사적 왜곡이라는 논란도 있지만 참신한 스토리로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2. 영화의 관전 포인트, 이병헌의 소름 돋는 내면 연기

2012년에 개봉한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보여준 이병헌의 연기는 광해군과 하선의 역 모두 훌륭하게 보여주어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광해군으로서 이병헌은 편집증에 시달리는 군주의 복잡함과 정치적 혼란에 휩싸인 왕국을 통치하는 무게감을 구현합니다. 이병헌은 광해군의 모습을 왕으로서의 두려움, 권위, 그리고 지도력의 부담감과의 투쟁을 묘사하기도 하였으며, 의연하기도 하고 연약하기도 한 통치자의 미묘한 내면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병헌은 격동의 궁궐 정치계에 우연하게 들어온 비천하고 연약한 평민 하선을 훌륭하게 연기합니다. 그의 하선 연기는 공감과 따뜻함,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으로 가득 찬 인물로 묘사하여 기존의 예민하고 차가운 광해군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어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병헌의 연기의 탁월함은 두 인물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묘사하는 그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는 왕의 정절적이고 권위적인 태도에서 하선의 사랑스럽고 친숙한 존재로 매끄럽게 변화하면서, 뚜렷한 개성을 교묘하게 탐색합니다. 이병헌 역할의 이중성은 권력과 겸손, 권위와 연민 사이의 이분법을 강조하면서 영화 이야기의 핵심 역할을 합니다. 그의 강렬한 묘사는 이야기를 정체성, 리더십, 그리고 인간 조건의 복잡한 세계로 관객을 끌어들입니다. 이병헌은 광해왕과 하선으로 분해 열연을 펼치며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깊이와 감성적 울림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남다른 깊이와 진정성으로 다면적인 캐릭터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다재다능한 배우로서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조선의 국왕 중 네 번째로 장수한 광해군의 일생

1574년부터 1641년까지 통치했던 조선의 광해군은 역사적인 음모와 복잡함으로 가득 찬 인물입니다.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 자녀를 낳지 못한 의인왕후가 그를 친아들처럼 키워냈습니다. 광해군은 165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도성이 위협을 받게되자 서자 출신 최초로 세자로 책봉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또한 왜적에 맞서 전면전에 나서서 싸운 최초의 세자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왕이 되기 이전의 시기에는 모두 그를 훌륭한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해군의 활약으로 명나라에서도 선조 대신 광해군을 왕에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선조는 자신의 왕위를 아들에게 빼앗기게 될까 봐 광해군은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선조는 병상에 누워서도 후계자 선정을 계속해서 미루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 교지를 내렸고 그제야 광해군이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극심한 권력 투쟁과 가족 분쟁의 기간 후에 왕위에 올랐고, 내분과 외부의 위협으로 가득한 나라를 계승했습니다. 광해는 통치기간 동안 권력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경제를 강화하고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기 위한 다양한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들은 종종 논란과 반대를 일으켰고 조정 내의 정파들의 양극화에 기여했습니다. 정치적인 음모와 내부적인 혼란 속에서, 광해의 통치는 또한 특히 일본과 만주족의 침략과 같은 외부적인 갈등에 의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가려는 그의 시도는 엇갈린 성공을 거두었고, 논란이 많은 군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왕좌에 오른지 15년 만에 서인들의 반정으로 폐위되었습니다. 그는 퇴위 후, 부인,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빌미삼아 조선의 조정을 흔들려는 시도가 있어 이후에 제주도로 다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 생활 4년 4개월 만에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의 나이 66세였지만 조선 역대 왕 중 장수한 궁왕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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